신제품을 만들어 달라던 사장님에게, 나는 다른 말을 꺼냈다
한 2세 경영자가 신제품을 만들어 달라며 찾아왔다. 매출이 멈춘 건 낡은 브랜딩 때문이라고 했다. 그런데 그 진단은 매끄럽지 않았다. 누구나 아는 그 제품이 정말 디자인 때문에 멈췄을까. 내 첫 재정의는 신제품 회의실이 아니라, 한 사람의 불안 안쪽에서 시작됐다.
한 회사의 대표가 나를 찾아왔다. 회사를 물려받아 대표가 된 지는 5년쯤, 대리 시절부터 실무를 직접 뛰며 그 회사에 몸담은 지는 15년쯤 된 2세 경영자였다.

수십 년 된 생활용품 제조사, 한 세대가 다 아는, 마트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집어 들었을 그런 제품을 만들던 곳이다.
문제는 분명해 보였다. 대표 제품의 매출이 더 이상 늘지 않는다. 그래서 그는 신제품으로 새 판로를 뚫고 싶어 했다. 이유까지 명쾌했다. "우리 브랜딩이 너무 옛날 그대로다. 지금 트렌드도, 요즘 고객의 눈도 못 잡고 있다." 벤치마킹할 브랜드까지 펼쳐 보이며 말했다. "여기는 기능으로 치면 우리보다 떨어지는데, 브랜딩하고 디자인이 좋아서 시장에서 잘 팔린다." 결론도 이미 나와 있었다. 외형 브랜딩과 패키지 디자인을 제대로 입힌 신제품을 잘 만들면 풀린다는 것.
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. 깔끔한 진단이었으니까. (그리고 고객이 스스로 내린 진단을 받아 그대로 실행해주는 건, 가장 편한 길이기도 하다.)
그런데 한 군데가 걸렸다. 매끄럽게 들리는 그 인과가, 사실은 매끄럽지 않았다.
생각해보자. 그 제품은 업계의 레전드였다. 나도 봤고, 내 주변 누구라도 살면서 한 번은 본 물건이다. 만약 "낡은 브랜딩"이 정말로 안 팔리는 진짜 원인이라면, 그건 처음부터 안 팔렸어야 했다. 그런데 그 제품은 수십 년 동안, 그것도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선점하며 팔려온 물건이다. 그렇다면 지금 멈춘 이유가 정말 브랜딩일까, 아니면 시대가 바뀐 걸까, 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일까. 나는 그 진단을 받아 적는 대신 추적하고 싶었다. 매출이 멈춘 게 정말 브랜딩과 디자인 때문인지, 시장은 이 제품을 실제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— 사실관계부터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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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래서 나는 신제품 디자인 회의로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. 대신 다른 걸 물었다. 왜 하필 지금, 기존 제품이 아니라 신제품으로 새로 시작하고 싶은가. 그 "신제품"이라는 답 뒤에 깔린 배경을 따라가면, 그가 진짜로 해결하고 싶은 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.
(BD의 일은 거의 늘 여기서 갈린다. 고객이 말한 문제를 푸는 사람과, 고객이 왜 그 문제를 들고 왔는지부터 따라가는 사람.)

질문을 따라가 보니, 진짜 문제는 "신제품 브랜딩"이 아니었다.
이대로 가면 회사가 — 매출 그래프 하나가 아니라 회사 자체가 — 존폐를 걱정해야 할 만큼 무너진다는 것. 그게 그가 진짜로 막고 싶은 것이었다. 그리고 그 붕괴의 뿌리는 신제품에 있지 않았다. 더 안쪽, 내부 인력 구조와 영업하는 방식, 그걸 끌고 가는 회사의 분위기와 방향성에 있었다. 신제품은 그 결핍을 가리려 손에 잡은, 가장 눈에 보이는 카드였을 뿐이다.
질문을 더 따라가자, 그가 진짜로 그리는 그림이 나왔다. 한때 두 사업 축이 반반씩 매출을 내며, 한 달에 두 번 정비할 틈조차 내기 어려울 만큼 바쁘던 시절이 있었다고 했다. 그는 신제품이 갖고 싶은 게 아니라, "그때로 돌아가고 싶다"고 했다. 그리고 그 자리를 가로막는 건 디자인이 아니었다. 새로 뽑을 사람을 어떻게 가르칠지, 낡은 설비와 빈자리를 어떻게 메울지 — 회사 안쪽의 문제들이었다.
이건 한 번의 질문으로 나온 게 아니다. 라포가 쌓이는 만큼, 답이 깊어졌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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처음 재정의를 꺼냈을 때,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. 당연하다. 신제품을 만들러 온 자리에서 "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다"라는 말을 듣는 건, 누구에게도 편한 일이 아니다.
그런데 묘한 게 있었다. 그를 소개해준 사람과 함께 있을 때의 그와, 나하고 둘만 있을 때의 그는 말이 조금씩 달랐다. 따로 만나 라포가 쌓일수록, 그는 마음을 더 열고 구체적으로 말해줬다. 일을 진행하면서 나는 설득의 논거를 촘촘히 깔았고, 그가 스스로 납득이 되는 지점에 이르자 — 그때부터 처음엔 공개하지 않았던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.
실은 그 사장님도 불안했던 거다. 다만 자기 회사의 약한 곳을, 치부를 입 밖에 내는 일이 익숙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. (그런 환경은 생각보다 흔하다.) 우리가 문제를 제대로 보고 다시 정의해야 그다음 검증도 솔루션도 있고, 결국 그걸 성과로 전환하는 데까지 같은 책임을 진다는 것 — 그 무게를 내가 진심으로 지고 있다는 게 확인되자, 그는 나를 "맡긴 업체"가 아니라 한 배를 탄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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전환은 한순간에 오지 않았고, 장소로 기억된다.

성장 의지를 보여주려 그가 본사 공장 외에 따로 낸 오피스에서 중간 회의를 했을 때 (그날은 동료들도 함께였다), 그리고 그와 나 둘만 식당에 마주 앉아 사적인 이야기를 나눴을 때. 특히 그 식사 자리가 분기점이었다.
그 전까지 우리는 문제를 재정의하고, 그 가설이 맞는지 검증하며 솔루션을 더듬는 단계에 있었다. 그 후로는 달랐다. 솔루션의 방향이 더 뾰족해졌고, 현장에서 — 주방부터 식당, 청소 현장, 세차 마니아까지 — 직접 쌓은 인뎁스 인터뷰 결과와 맞물리면서, 단순 시장조사가 아니라 발로 뛰며 나온 인사이트로 "NEXT를 어떻게 가져갈지"를 제안할 수 있게 됐다.
눈에 보이는 숫자를 들이밀고 싶지만, 그때 가장 중요했던 신호는 정량이 아니라 정성이었다. 잠재 고객 인터뷰가 늘었고, 한 사람당 인터뷰가 더 오래 이어졌고, 답변이 더 정교해졌다. 쉽게 말해, 인터뷰이들의 반응이 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"연결"되어 돌아왔다. (이게 별것 아닌 것 같아도, 현장에서 이 연결감이 짙어지는 순간은 굉장히 중요한 정성적 신호다. 숫자가 따라오기 전에 먼저 오는 신호.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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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 일을 지나며 나는 한 가지를 확신하게 됐다. BD는 고객사가 시키는 대로 현장에 나가 "이게 맞는지" 검증만 하는 일이 아니다. 그 문제가 진짜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입체적으로 종합해 보고, 필요하면 다시 정의해야 하는 일이다. 이 생각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.
다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한 가지가 다르다.
지금의 나라면, 재정의하고 그 문제를 푸는 데만 몰두하지 않았을 것이다. 먼저 가장 시급하게 풀어야 할 문제들을 리스트로 펼쳐 놓고, 그중 더 근원에서 다시 정의해야 할 지점을 초반에 제시했을 것이다. 그리고 그걸 고객이 처음 들고 온 문제와 "병렬로" 같이 갈지, 아니면 풀어야 할 문제 자체를 바꿀지를 — 그 설득이 되느냐를 핵심에 두고 — 더 일찍 가늠했을 것이다.
그러니까 문제를 재정의한다는 건 여전히 모든 일의 시작점이다. 바뀐 건 "어떤 문제부터" 재정의할지를 더 구조화해서 제안하고 실행하게 됐다는 것. 그 한 번의 경험이 내 세계관을 넓혔고, 확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.
내 첫 재정의는, 그렇게 신제품 회의실이 아니라 한 사람의 불안 안쪽에서 시작됐다.